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거 제도 (문단 편집) ===== 역과 ===== 역과는 [[통역사]]와 [[외교관]]인 [[역관]]을 선발하는 시험으로, 사역원(司譯院)에서 주관하였다. 지금으로 치자면 통번역사 시험 + [[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]]에 가까웠다. [[중국어|한학]], [[일본어|왜학]], [[몽골어|몽학]], [[만주어|여진학]]이 있었는데, 한학은 초시에서 45명(한성시: 23명, 해주시: 7명, 평양시: 15명)을 선발하고, 복시에서 13명을 선발했다. 왜학, 몽학, 여진학은 각각 초시에서 4명, 복시에서 2명을 선발했다. 즉 왕 앞에서 시험을 보는 전시가 없었던 것. 참고로 사역원에 입사하는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는데, 현직 역관의 추천이 있어야 되며 심사위원에 해당되는 사역원 관리 15명 중 13명의 동의를 받아야 입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. 여담으로 [[세종]] 시절엔 한학부가 사실상 중국어마을(...)이 된 적 있었다. 무려 한학부에서 중국어를 안 쓰고 한국어를 쓰다기 걸리면 군역으로 보내버린다는... (...)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있었던 기록이다.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주변 외국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, 통번역 수요가 증가하고, 이 과정에서 역관의 지위가 상승하게 된다. 또한, 통번역 업무를 수행하면서 비공식적인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. 실제로, 초시 합격 자격만으로도 품계는 받을 수 없지만 변경 지역의 관청에서 통번역 품을 팔거나 개시(開市)와 후시(後市)에서 무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. 그러다가 말기엔 특정 역관 가문이 차지하는 세습직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